近代新生汉字词的朝鲜半岛传播(朝鲜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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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서론

제1절 연구 목적

아편전쟁 이후 특히 20세기에 들어 2000여년 전부터 계속 이어받은 중국 문명은 서양 문화체계의 충격을 받아 중단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고 한다[1]. 주지하다시피 한자문화권에 처해 있는 조선반도는 옛날부터 중국 전통문화와 사상의 영향을 받아 왔다. 새로운 문물,언어,신개념과 중국 전통문화,사상이 부딫히는 과정에서 중국이 조선반도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어떠한 것인가 연구할 만한 주제이다. 본 연구는 근대 신생한자어의 판별 기준을 세우고 중국어 기원의 신생한자어가 한국어로 유입된 경로와 정착,소멸 과정을 검토함으로써 중국어 기원의 신생한자어가 개화기에 한국어 어휘체계에 미친 영향을 밝히는 데 목적을 둔다. 한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한자어들은 기원적 측면에서 볼 때 개화기에 서양의 새로운 문물 제도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한반도보다 일찍 개화된 중국이나 일본에서 새롭게 형성된 한자어가 차용된 경우가 많다. 이때에 유입된 한자어는 천문·지리·인문·과학·정치·경제·교육 등 다방면(多方面)에 걸쳐 한국어 어휘체계에 지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근대기 신생한자어가 한국어로 유입된 가장 중요한 경로는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2]일 것이다. 이원순(1986:81)은 한역서학서란 명말·청초에 걸쳐 유교적 한자문화권에서 천주교 포교에 종사하던 서양 성직자들이 한족(漢族)에게 천주교를 선교하는 한편 서양 문명을 전수하기 위하여,서양의 종교·윤리와 지리·천문·역사·과학과 기술 관계의 서적을 한문으로 번역 또는 저술한 서책을 말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해석은 한역서학서의 범위를 명말청초로 그 시기를 한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한역서학서라고 하는 것은 명말청초,즉 16세기 말~18세기 초 중국에 천주교를 선교하러 온 야소회사(耶蘇會士)들의 번역서와 저서뿐만 아니라,19세기에 중국에 선교하러 온 개신교 선교자들의 번역서와 저서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후술하겠지만 이렇게 시기 구분을 하는 것은 18세기 초 강희제(康熙帝)가 금교령을 반포한 후의 백년간에 선교사들의 서학 번역과 저술 활동이 다수 중단되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관련이 있다.

16세기 말기부터 18세기 초까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1552~1610,중국명:利瑪竇)를 비롯한 야소회사들이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동안에 서양 신지식과 신문물제도(新文物制度)를 소개하는 이른바 한역서학서들을 다수 편술·번역하였다. 이원순(1986:86)에 의하면 명청 180여 년 간에 야소회사들에 의해 편술·번역된 한역서학서는 350여 종에 달한다고 한다. 물론 서양 선교사들의 이러한 학술 활동은 천주교 복음 전파를 위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중국 사대부들의 영혼의 문을 두드려 열고 당시 중국에 없었던 서양 최신의 지식과 문물제도를 중국인에게 전달해 주었으며,간접적으로 중국의 근대화를 가속화시켰다. 크게는 두 계열,즉 종교·윤리서와 과학·기술서로 분류해 왔던 이들 한역서학서는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일본 및 베트남 등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여러 나라에 유포되어 언어적으로나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한역서학서가 한국에 처음으로 도입된 기록은 선조 시대의 학자 이수광(李睟光)의 저서인 『지봉유설(芝峯類說)』이다. 이 기록은 1603년 북경에 사대사행원(事大使行員)으로 사행한 바 있는 이광정(李光庭)이 利瑪竇의 세계지도를 도입하였음을 전해 주고 있다. 그 후 사대사행원들에 의해 수많은 한역서학서들이 조선에 유입되고 일부 조선 지식인들에게 열독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중화 중심이라는 세계관에서 탈출하게 하여 직방(職方) 외의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였다. 이수광을 비롯하여 星湖 이익(李瀷),順菴 안정복(安鼎福),河濱 신후담(愼後聃),유몽인(柳夢寅) 등 조선 석학들이 한역서학서와 접촉하여 논평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18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18세기 초 예의지쟁(禮儀之爭)의 발단으로 강희제가 금교령을 내리고 선교사들을 추방하기까지 하여 백년간 서양 선교사들의 서학 번역과 저술 활동이 다수 중단되었다. 19세기 초 스코틀랜드 선교사인 모리슨(Morrison,Robert,1782~1834,중국명:馬禮遜)은 영국 런던 교회의 개신교 선교사 신분으로 중국에 파견되었다. 利瑪竇 등 야소회사들이 동서 문화 교류의 통로를 열어준 선구자라고 하면 동서 문화 교류의 붐을 일으킨 개척자는 馬禮遜을 비롯한 개신교 선교사라고 할 것이다. 특히 후자는 동서 문화 교류의 내용이나 심도가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포교 활동뿐만 아니라 사전 편찬이나 서학서 번역,신문·잡지 발행 등 학술 활동도 적극적으로 진행하였다. 이 시기에 서양의 신문명 제도의 우월성을 소개하기 위해 천문·지리 이외에 정치·법률·경제·사회 등의 내용이 담겨진 수많은 한역서학서들이 번역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 조선에서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심해짐에 따라 한역서학서가 조선으로 유입되는 일도 금지되었다. 이 시기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중국은 정치계뿐만 아니라 사상계에도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중국 지식층은 서양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이에 적합하게 대응하여야 한다는 역사의식이 생겨나고 이에 따라 『海國圖志』[3]와 『瀛環誌略』 등 이른바 양무서(洋務書)가 출간되었다. 이 시기에 조선사회에서 서양의 지식을 확대시켜 준 서적이 바로 청래양무서(淸來洋務書)이다. 1876년 조선이 개항되기까지 『海國圖志』와 『瀛環誌略』 등 양무서들이 북경사대사행원들에 의해 조선으로 도입되었다. 비롯 조선 지식인들이 19세기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번역된 한역서학서의 양분을 직접 섭취하지 못하였지만 『海國圖志』나 『瀛環志略』을 통해 한역서학서의 성과를 간접적으로 접하였다고 할 수 있다. 후술하겠지만 이 서적들이 조선 위정자(爲政者)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중에는 1880년 정관응(鄭觀應)의 『易言』처럼 한국어로 번역되어 언해본으로 출간된 경우도 있다.

이상의 사실을 감안하면 한국 근대어휘체계에 중국어에서 유입된 신생한자어의 영향이 있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현재 중국 학계에서는 중일 간의 어휘 교류 연구가 주를 이루고 중한 간의 어휘 교류 연구는 드물며,한국 학계에서도 한일 간의 어휘 교류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반하여 근대기 한중 간의 어휘 교류 연구는 상대적으로 빈약한 실정이다. 또한 한중 양국 학계에서 근대 한자어 교류와 관련한 연구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 신생한자어를 판별하고 유형화할 수 있는 기준이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 이는 역시 한국과 중국 학계의 편향적인 연구 현실과 일정한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연구 현실은 강제적 한일병합을 전후한 시기에 중국이 새로운 문물제도와 사상에 대한 언어적 요구를 더 이상 충족시키지 못하고 일본이 중국 대신 한자문화권 나라에 신생한자어를 수출한 역사와 관련이 있다. 특히 한국의 경우 한일병합을 전후한 시기에 다량의 신생한자어가 일본어에서 유입되고 한국 근대 어휘 체계에 정착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주목하면서 한국 학계의 주류 방향은 일본어와의 어휘 교류에 집중된 면이 있다. 그러나 상술한 바와 같이 근대기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한역서학서나 저서를 통해서 한국 사회에 보급되어 정착된 신생한자어도 많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4].

근대기 한중 간 어휘 교류사에 대한 연구는 동아시아의 근대화라는 큰 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근대기 신생한자어의 생성과 전파는 한중일 삼국이 근대 국가로 발전하는 역사적 배경 및 각국의 사회 배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이에 이 책에서는 한중일 삼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취하여 어휘문화사라는 각도에서 중국 기원 신생한자어가 근현대 한국어 어휘 체계에 미친 영향을 검토할 것이다. 중국어 기원 신생한자어가 조선에 유입되어 정착·소멸하는 과정을 연구하는 본 연구는 한국 근대 신생한자어의 계보 및 어휘체계 성립사 연구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한자라는 매개체를 사용하여 서양의 근대 문명을 어떻게 수용하였고,또 서양의 근대 문명을 수용할 때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등,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을 검증하는 여러 연구와 밀접히 관련된 기초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근대 한중간의 어휘 교류를 연구하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